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티 포크츠 (문단 편집) == 지도자 경력 == || [[파일:external/www.dfb.de/csm_599-Vogts_Berti_910e03ac49.jpg|width=100%]] || || '''[[UEFA 유로 1996|유로 1996]] 우승 직후 환호하는 포크츠'''[* 그의 감독 경력 유일한 [[리즈 시절]]이기도 하다.] ||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더니, 지도자로써는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먼저 33살이던 1979년, 은퇴 직후 곧바로 서독 U-21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장장 11년 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그 중간인 1986년에는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프란츠 베켄바워]]를 보좌하며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을 통산 3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베켄바워가 감독직을 사임하자 포크츠가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하였다. 포크츠가 물려받은 팀은 직전에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 외에도 지난 10년간 월드컵에서 두 차례 준우승과 1차례 유로 우승을 일궈낸 팀이었다. 게다가 여기에다 독일 통일로 인해 [[마티아스 자머]], [[울프 키르스텐]] 등 동독 선수들까지 가세하게 되어 가히 무적의 팀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첫 번째 메이저 대회인 [[UEFA 유로 1992|유로 1992]]에서는 조별리그에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에게 2:0 승리, [[CIS]](독립국가연합)에게 1:1 무승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에 1:3 패배로 불안하게 4강에 진출했고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을 3:2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덴마크]]에 0:2로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두 번째 메이저 대회인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위르겐 클린스만]]을 앞세워 스페인과 무승부, [[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볼리비아]]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한국]]을 상대로 승리하며 16강에 진출했으나 당시 한국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도 3:2로 상당히 진땀나는 승부였다. 특히 막판에는 40도를 넘나드는 경기장 온도 속에서 체력이 방전된 독일 선수들은 거의 걸어다니는 상황이었다. 만약 한국과의 경기도 추가시간이 좀 더 있었거나 전반전도 후반전과 같은 경기력이었다면 비기거나 패했을 수도 있는 경기였다. 하필 한국전에서 당시 팀의 중원을 담당하던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관중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만행으로 중도 귀국 조치 시키기도 했다. 16강에서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를 상대로 3:2 승리를 거뒀으나, 8강에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불가리아]]에 1:2로 역전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유로 1992 준우승이야 넘어갈 수 있어도 당시 1990 월드컵 우승 멤버와 자머, 키르스텐 등의 동독 선수들이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1994 월드컵에서 그것도 한참 전력이 아래인 불가리아를 상대로 일격을 당했다는 건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유난히 노장들에게 집착을 했는데, 1994 월드컵에서 [[루디 푈러|푈러]], 베르톨트, [[안드레아스 브레메|브레메]] 등 은퇴 직전이거나 대표팀 일선에서 물러난 선수들을 등용해 평균 연령을 너무 높였고, 미국의 더위를 못 이겨 결국 체력 저하로 토너먼트에서도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더니 8강에서 제대로 당했다. 그리고 1990 월드컵 우승 당시의 전술을 그대로 답습했지만, 이미 상대들은 독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에펜베르크가 관중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사건이나 팀의 핵심인 [[로타어 마테우스]]와 [[위르겐 클린스만]]의 갈등으로 대표되는 부족한 팀 장악 능력, 소홀한 미디어 관리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포크츠는 1994 월드컵 직후 감독직을 사임하려 했고, 실제 언론에서도 사임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였고, 당시 [[바이에른 뮌헨]], [[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 감독설이 나왔지만, 축구 협회의 만류로 사표는 반려되고 계속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유지하였다. [[UEFA 유로 1996|유로 1996]]을 준비하며 레네 슈나이더, 토드, 세바스티안 치게, [[마르쿠스 바벨]] 등 A매치 경력이 없던 선수들을 적극 기용하며 [[세대교체#s-1|세대교체]]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나, 이런 신인들이 A매치에 바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실수를 연발하면 다시 내치는 등 세대교체를 준비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엔 노장들만 지나치게 믿고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포크츠가 준비한 포메이션은 1-4-4-1로 [[마티아스 자머]]를 [[스위퍼(축구)|스위퍼]]로 두고 그 위에 치게 - 콜러 - 헬머 - 로이터를 4백으로 두는 극단적인 수비적인 포메이션이었다. 결국 잠머의 수비 능력과 한방이 가능한 [[위르겐 클린스만]]으로 경기를 끝내겠다는 포크츠의 전략은 유로 1996에선 먹혀들어 경기당 1.17실점이라는 극강의 수비력을 바탕으로 결승전에서는 [[올리버 비어호프]]의 예상치 못한 활약을 바탕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거기에 포크츠는 이 대회 우승을 통해 '''[[UEFA 유로]]를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최초이자 유일한 축구인'''이라는 대기록도 갖게 되었다.[* 다만 선수로서 우승을 차지한 [[UEFA 유로 1972|유로 1972]]는 호르스트 회트게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다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공수의 핵심인 [[마티아스 자머]]와 [[위르겐 클린스만]]의 하락세, 대체 선수가 없었던 상황에서 유로 1996의 우승은 비록 우승이지만 오히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과 포크츠 본인에게는 독이 되어 버렸다. 유로 1996의 영광을 노리고 [[마티아스 자머]] 대신 [[로타어 마테우스]]까지 복귀시키는 강수를 뒀지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요행이 먹혀들지 않고 8강전에서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에 0:3 완패를 당하며 두 대회 연속 8강에 그쳤다. 1998년 월드컵 직후에도 독일 대표팀 감독을 유지하던 베르티 포크츠는 결국 9월에 감독직을 사임한다. 2년간 휴식을 취하던 베르티 포크츠는 2000년 11월,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감독으로 복귀한다. 리그 4위를 기록해 다음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티켓을 따냈지만 한 시즌만에 사임하고 2001년 8월,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된다. 7개월 동안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베르티 포크츠는 2002년 3월,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직을 옮긴다. 참고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아마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잉글랜드]]가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을 최초로 외국인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잘 나가는 것을 보고 자극 받아 스코틀랜드도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유로 1996에서 우승을 하며 능력을 검증한 포크츠를 영입한 모양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포크츠가 감독이 된 이후에 여러번에 걸쳐 굴욕적인 패배를 많이 겪었다. 스코틀랜드 감독 시절 시작부터 프랑스한테 0:5, 한국에 1:4로 참패 당하는 등[* 당시 이 결과에 대해서 스코틀랜드에서 충격이 컸는지 [[BBC]]에서 의견 수집까지 할 정도였다. B팀이라고, 주전 선수들이 빠져서 그렇다고 정신승리를 하는 의견도 보이는데, 당시 스코틀랜드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한 뒤로 스코틀랜드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베르티 포크츠 체제가 막 들어서면서 세대교체를 시도 중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http://news.bbc.co.uk/sport2/hi/sports_talk/1991612.stm|#]]] 내내 형편없는 성적과 경기력으로 내내 언론의 질타를 받던 포크츠는 [[UEFA 유로 2004|유로 2004]] 예선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아이슬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축구 국가대표팀|페로 제도]], [[리투아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리투아니아]]와 같은 조로 편성되어 조 2위를 차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네덜란드와의 홈 1차전에서 1:0으로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며 생명을 연장하는 듯 했으나 비기기만 해도, 심지어 원정다득점 제도에 의해서 득점한 상황에서는 1골 차이로만 져도 본선 진출이 가능한 원정 2차전에서 0:6으로 거짓말같은 참패를 당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유로 2004 예선 직후 몰도바와의 월드컵 예선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스코틀랜드 언론의 비난을 받은 포크츠는 계약기간이 절반이 남았지만 스코틀랜드 감독직을 자진 사퇴한다. 그리고 다시 잠시 야인의 길을 걷다가[* 이 과정에서 2005년 가을에는 [[조 본프레레]]가 한국 대표팀 감독직을 사퇴한 자리를 메울 새 감독 후보군들 중 하나로 포크츠 본인도 물망에 올랐으나, 네덜란드 출신의 [[딕 아드보카트]]가 선임되면서 무산되었다.] 2007년 1월, [[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4년 계약을 맺고 감독직으로 복귀했으나, [[2008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가나|2008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8강에 머무르며 1982년 대회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나이지리아와 같은 팀에게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8강이라는 성적은 호성적이라고 볼 수가 없다.] 결국 여론의 압박을 못이겨 자진사퇴한다. 이후 2008년 4월, [[아제르바이잔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2010 남아공 월드컵]], [[UEFA 유로 2012|유로 2012]],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2014 브라질 월드컵]] 등의 예선에서 모두 [[영 좋지 않다|영 좋지 않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축구 협회에선 만족한 듯 꾸준히 연장 계약을 체결하여 지금까지 아제르바이잔 감독직을 수행 중이었으나 [[UEFA 유로 2016|유로 2016]] 예선에서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하지만 경질의 효과도 전혀 보지 못하였고, 그렇게 아제르바이잔은 유로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위르겐 클린스만]]과의 친분으로 2014 브라질 월드컵 기간에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특별 기술고문으로 임명되어 월드컵 기간에 클린스만을 보좌하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결국 2015년 3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기술이사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러나 2016년 가을, 클린스만이 미국 대표팀 감독직에서 지역예선에서의 성적 부진 끝에 짤리면서 포크츠 역시 기술이사직에서 같이 사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